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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의사 윤호
구분 역사인물
내용 설진을 헤치며 오직 독립(獨立)을 위해 싸운 의사 윤호(尹浩)

두만강(豆滿江)의 바람은 차가웠다. 경흥(慶興)에서 도보로 한참 걷다가 나룻터에 와서 윤호(尹浩)는 멈짓섰다. 나룻배는 이쪽에 건너와 있었지만 배를 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사공도 없었다. 그는 나룻터에 자리한 주막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사공인듯한 사람이 나와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윤호(尹浩)는 어서 강을 건너야겠기에 지폐 한 장을 상위에 올려놓자 사공인듯한 사람이 머리로 따라오라고 끄떡한다. 평상시 같으면 많은사람이 오고갈 나룻배에 그는 혼자 타고 만주(滿洲)로 건너갔다. 강을 건너자 사공은 한국말로「아편장사 덕 봤소이다. 왜놈들이 아편장사 쫓아갔습니다. 어서 빨리 가십시오. 놈들이 총질을 할지모르니 빨리 강둑을 넘으시오. 뛰지말구요.」

윤호(尹浩)는 이렇게해서 두만강(豆滿江)을 넘고 러시아 땅까지 들어가서 우리나라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을 찾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엔 한국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독립투사로서는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 단체로 구실을 하는 것 같아서 소일을 하다가 만주(滿洲)로 건너와선 투쟁적인 동지들과 함께 총을 들고 왜구들과 싸웠다. 먹을 것에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치는 동지들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허나 어데를 가나 똑같은 현상이지만 뜻만 가지고서는 어려운 난국이 많아서 그는 독림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中國)으로 건너갔다.

중국(中國)에선 같은 동포이면 왜구의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이 있어서 그에게 하루속히 조국으로 돌아가서 진정한 한국사람이 되라고 타이르다가 그놈의 밀고로 몰려오는 왜놈의 헌병 둘을 죽이고 탈주하여 상해(上海)에 들렀다가 이쪽 독립투사들의 사정도 어려워서 그는 국내에 들어가 독립운동기금을 마련할 생각으로 국내(國內)에 들어왔다가 잠깐 가족을 보고 가기위해 고향에 들렸다가 왜놈의 경찰에 붙들려서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15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주산면(珠山面) 증산리(甑山里)가 고향이다. 28세때 한일합방이 이루워지자 울분에 밤잠을 봇이루다가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러시아 만주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하며 투쟁하다가 고국에 들어와선왜경에게 잡힌 것이다. 그는 형무소(刑務所)에서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했다. 독립운동은 반드시 무장을 갖춰서 투쟁하여야하며 다음은 나라안에서 투쟁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주(滿洲)에도 여러 가지의 독립 단체가 있으나 지도자들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독립단체가 있는데에는 불만이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을 하는 인사들이 독립을 얻은 다음의 나라안의 권력구조까지 조성한다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독립투사는 어디까지나 독립투사이므로 권력에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15년간 사상범으로서 모진 학대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독립(獨立)만을 위해 옥고를 치뤘다. 그가 출옥할 때 는 반기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라고 외치고 싶지도 았았다.

그는 고향 주산에 돌아와서 그를 따르는 동지들을 모아서 남포 청년상회(남포 청년상회)라는 상회를 조직하고선 바깥으로는 소비절약과 염가판매란 형식을 취하고 상회구실을 하였으나 사실은 내적으로 동지들을 모아서 항일운동(抗日運動)의 중심체가 되어왔다. 그는 동지들을 만나면 만주(滿洲) 간도(間島)에는 우리나라에서 땅을 빼앗긴 동포가 몇십만이 살고있다는 이야기와 왜군들이 눈씻고 볼래도 우리나라 독립군은 없으나 그들은 우리독립군에게 많은 희생을 당하며 우리독립군은 건재하다는 이아기도 들려줬다.

왜구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40년 독재는 성공치 못할거라고 자세히 설명도 하다가 왜구들이 우리나라 백성들로부터 보복을 당한다는 그의 지론도 들려줬다. 남포청년회의(藍袍靑年會)는 날이 갈수록 흥해갔다. 이곳저곳서 청년들이 모여와선 그를 만나기를 원했고 그를 무척 따랐다.

그런날이 5년이 조금 지나서 왜경들은 상회의 폐지명령을 내려버렸다.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이 있을 때 그들은 젊은이들의 모임체를 없애버렸지만 그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위해 싸우는거다 라고하고 혼자 미소를 짓기도 했었다.
그는 그후 집에서 조용히 몇일을 보내다가 아침에 집에서 나가 어데던지 돌아 다녔다. 왜경이 어데를 다녀오느냐고 물으면 내나라 내땅 어데간들 왜 물어보느냐고 ? 대답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때로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때로는 만주(滿洲)벌판 또는 중국에서 총을 들로 독립운동을 했고 서대문형무에서 총을들고 15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해선 다시 독립운동에 몸바친 윤호(尹浩)!그는 창으로 불굴의 정신으로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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